도시는 단순히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니다. 도시는 인간의 감각과 행동을 매일같이 조율하고, 서서히 재형성하는 환경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도시의 품질은 건축의 미학이나 개발 규모 같은 표면적 지표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의 삶에 깊게 작용하는 것은 밀도, 속도, 자극의 총량이며, 이 세 가지가 어떤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에 따라 도시는 회복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소모의 기계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수도권은 이 균형이 무너진 대표적인 사례다. 인구밀도는 이미 극단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이를 감당할 물리적 여유는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 도로는 좁고, 보행 공간은 불연속적이며, 차량과 사람은 항상 같은 공간에서 충돌한다. 평균 용적률은 계속 높아지지만, 그에 비례하는 도로나 공공 완충 공간은 거의 늘지 않는다. 도시의 모든 기능이 압축되면서, 일상은 흐름이 아니라 마찰로 구성된다.
이 구조에서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예측 가능성’이다. 언제 길이 막힐지, 어디서 소음이 터질지, 어느 순간 시야가 과잉 정보로 포화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일상이 된다. 사람의 신경계는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 오래 노출될수록 경계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상태가 만성화되면 피로는 사라지지 않고 성격처럼 굳어진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는 모두가 늘 조금씩 날카롭고, 조금씩 방어적이다.
간판과 시각 정보의 문제는 이 맥락에서 단순한 미관 논쟁이 아니다. 상업 공간에서 경쟁적으로 증식한 간판들은 서로를 압도하기 위해 점점 더 크고, 더 밝고, 더 자극적인 신호를 뿜어낸다. 그 결과, 거리를 걷는 행위 자체가 끊임없는 선택과 판단을 요구하는 노동이 된다. 시선을 둘 곳이 없고, 쉬어갈 지점도 없으며, 시각은 계속해서 끌려다닌다. 이것은 도시가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며 흔드는 방식에 가깝다.
주거 공간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아파트는 효율과 수익을 기준으로 배치되면서, 도시 차원의 질서보다는 단지 내부의 최대치만을 추구해 왔다. 그 결과 도시는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졌고, 바람길은 끊기고, 시야는 막히며, 교통은 특정 지점으로 몰린다. 단지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맞닥뜨리는 혼잡과 소음은, 집이 휴식의 공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무너뜨린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는 매우 일관적이다. 쉽게 피로해지고, 쉽게 신경질이 나며, 타인에게 관대해질 여유를 잃는다. 문제는 이 현상이 개인의 성격이나 인내심 부족으로 설명되어 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환경적 결과다.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는 구조 속에서 사람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없던 병이 생길 것 같고, 실제로 몸이 먼저 반응하며, 삶의 시간이 조금씩 단축되는 느낌을 받는 것도 과장이 아니다.
이 모든 상황 위에 다시 얹히는 것이 국토부가 발표한 대규모 주택 공급 계획이다. 수도권 포함 '핵심 용지'에 135만 호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은 주거 불안을 해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밀도 관리라는 핵심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이미 한계에 도달한 구조 위에 또 다른 하중을 얹는 방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착화한다. 주택은 늘어날 수 있지만, 삶의 질은 그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감각은 종종 형벌에 가깝게 느껴진다. 견디는 것이 전제가 된 공간,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환경. 여기에 오래 머무를수록 사람은 무뎌지거나, 반대로 극도로 예민해진다. 어느 쪽이든 건강한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진다는 감정은, 연민이라기보다 구조를 인식한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대안의 방향이다. 수도권과 같은 초고밀·고자극 도시가 존재한다면, 그에 대응하는 반대급부의 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느린 속도로 작동하고, 중저층 위주의 블록이 규칙적으로 배치되며, 도로 폭이 넉넉하고, 녹지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도시. 이동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되고, 외출이 소모가 아니라 환기가 되는 공간. 이런 도시는 이상향이 아니라, 이미 여러 나라에서 검증된 현실적 모델이다.
문제는 이런 가능성이 보이는 순간, 자본과 개발 논리가 앞서 들어온다는 점이다. 지방의 살기 좋은 도시가 되기도 전에, 수도권에서 이미 실패한 고밀 개발 방식이 그대로 복제된다. 고층 빌딩과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와 생활 인프라는 뒤늦게 따라붙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대안이 아니라 확장판이 된다. 수도권의 문제를 완화하기는커녕, 다른 지역으로 전염시킨다.
이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균형은 더욱 무너진다. 모든 것은 효율과 속도를 기준으로 재단되고, 여백과 느림은 낭비로 취급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일정한 밀도 이하에서만 타인과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고, 일정한 자극 이하에서만 안정적인 정서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무시한 채 도시를 계속 밀어붙인 결과가 지금의 피로다.
결국 이 문제는 도시계획의 기술적 실패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정상적으로 기능하는가를 기준으로 공간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밀도에는 상한이 필요하고, 속도에는 제동 장치가 필요하며, 자극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는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건강의 문제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소모시키는 도시 구조를 유지하면서, 정말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만약 지금의 방식이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고, 갈등을 증폭시키며, 건강을 갉아먹고 있다면, 해답은 더 많은 압축이 아니라 압축을 풀어내는 방향에 있을 수밖에 없다. 도시를 다시 인간의 감각에 맞게 조율하는 일, 그게 결국 개선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그 출발선에 있는 것이 도로다. 지금 한국의 많은 도시에서 도로는 흐름을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병목을 만드는 구조물로 기능하고 있다. 폭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차량, 보행자, 자전거, 상업 활동이 한 공간에 억지로 겹쳐지다 보니, 이동은 늘 충돌을 전제로 한다. 도로를 넓힌다는 것은 단순히 자동차를 더 빨리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겹침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차와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거리,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여유,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동선을 만드는 것. 그런 도로는 도시 전체의 긴장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도로가 완충 장치라면, 건물의 높이는 도시의 태도를 결정한다.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고층 아파트 단지와 타워형 개발은 수용 능력을 극대화했을지는 몰라도, 사람에게 주는 감각은 일관되게 위압적이었다. 시선은 위로 끌려 올라가고, 하늘은 잘게 쪼개지며, 거리에서 느껴지는 스케일은 인간의 보행 리듬과 어긋난다. 이런 공간에서는 걷는 행위 자체가 불안정해진다. 게다가 용적률에 비례해서 주변 도로가 확장되어야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하지 못하면 만성 교통침체에 빠지고 서민들의 인내심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점까지 모두 고려한 지점은 그리 많지 않다.
4~8층 규모의 중저층 다세대주택/상가주택 블록은 사람의 감각과 훨씬 잘 맞는다. 이 정도 높이에서는 건물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거리와 사람이 전면에 놓인다. 창과 발코니, 출입구가 보행자와 시각적으로 연결되면서, 거리는 감시와 교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이 된다. 질서적으로 형성한 충분한 도로의 중저층 다세대주택/상가주택은 잘 배치만 하면 상권도 잘 살릴 수 있다. 이는 범죄 예방이나 공동체 회복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떠나, 일상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직결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중저층 개발이 무질서하게 흩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개별 필지 단위의 난개발이 아니라, 블록 단위로 높이와 밀도, 동선을 정리해야 한다. 블록마다 명확한 규칙이 있을 때 도시는 예측 가능해진다. 예측 가능성은 곧 심리적 안정이다. 사람은 규칙이 있는 공간에서 에너지를 아끼고, 무질서한 공간에서 에너지를 소모한다.
외장재와 색채 역시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도시에서는 각 건물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튀는 재료와 색을 사용한다. 그 결과 도시는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수십 개의 장면이 동시에 튀어나오는 혼란스러운 화면이 된다. 이 과잉은 시각적 피로를 낳고, 피로는 다시 짜증과 신경질로 전이된다. 외장재를 절제하고, 색채의 범위를 제한하며, 질감을 통일하는 것은 창의성을 억압하는 일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배경을 안정시키는 작업이다.
간판 역시 마찬가지다. 간판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간판의 크기, 위치, 밝기, 정보량을 정리하자는 것이다. 지금처럼 서로를 압도하기 위해 커지고 밝아지는 간판들은 상업 경쟁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도시 전체의 신경계를 자극하는 소음이다. 간판이 질서 있게 배치된 거리는 상업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고, 천천히 걷게 만들며, 소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핵심은 ‘질서’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는 통제나 획일화가 아니라, 도시가 어떤 리듬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합의에 가깝다.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허용하는지, 어느 정도의 밀도를 넘기지 않는지, 어떤 색과 재료가 배경이 되는지, 이동의 기본 속도는 무엇인지. 이런 합의가 있을 때, 도시는 더 이상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결국 개선이라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거창한 비전을 도입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충분히 알려진 원칙들을 다시 적용하는 일이다. 도로는 넓게, 건물은 낮게, 자극은 절제하고, 배치는 규칙적으로.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덜 신경질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도시야말로, 수도권의 과밀을 완화하고,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 진짜 대안이 될 수 있다.